부처님 일생

26.아함경의 사성제 팔정도

몽하나 2021. 4. 7.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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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몽 하나입니다.

오늘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아함경의 사성제 이야기입니다.

지난 시간을 못 보시고 오신 분께서는 잠시 읽고 오셔도 괜찮습니다.

2021.03.31 - [부처님 일생] - 25. 중도의 실천과 이익. 마사히 사야도 초전법륜경

 

25. 중도의 실천과 이익. 마사히 사야도 초전법륜경

안녕하세요. 몽 하나입니다. 마하시 사야도 스님의 초전법륜 경과 법보신문 전오식과 제6 의식의 내용으로 부처님 말씀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어 마하시 큰스님의 설명과 함께 따라가 보겠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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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섯 번째 이야기 시작합니다.

부처님께서 라자가 하에서 멀지 않은 왕원에서 쉬시면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도를 닦는 이는 반드시 네 가지 진리를 알아야 한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진리를 알지 못해 오랫동안 바른길에서 벗어나 생사에 매여 헤매느라고 쉴 새가 없다.

어떤 것이 네가지 진리인가.

 

첫째는 이 세상 모든 것이 괴로움이니 이것을 라고 합니다.

둘째 괴로움은 집착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니 이것을 이라고 합니다.

셋째는 괴로움과 집착이 없어져 다 한 것을 이라 합니다.

넷째는 괴로움과 집착을 없애는 길을 라 합니다.

(고집멸도)


괴로움의 뜻을 알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하므로 오랫동안 먼 길을 헤매어 생사가 쉬지 않다.

그러나 반드시 이 세상 모든 것이 괴로움임을 알 것이니, 괴로움이란,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의성 제이다. 마땅히 들어라. 태어나는 것, 늙는 것, 병드는 것, 죽는 것, 번민,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 구하는 것이 얻어지지 않는 것, 등이다. 그러므로 오온으로 된 이 몸이 모두 괴로움이다. 

 

※온이란 곧 집합 ·구성 요소를 의미하는데, 오온은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다섯 가지이다. 처음에는 오온이 인간의 구성요소로 설명되었으나 더욱 발전하여 현상 세계 전체를 의미하는 말로 통용되었다.


 

녹야원 첫설법지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의 발생의 성제()이다. 마땅히 들어라.

후유 (열반의 깨달음을 얻지 못한 이가 미래에 받는 미혹의 삶:과보)

를 일어나게 하고, 기뻐하는 것, 욕심내는 것, 모든 것에 집착하여 욕망에 빠지는 것 이 그것이다.

그것에는 탐내는 생각을 일으켜 무엇을 욕구하는 것 성욕, 유애(개체를 존속시키고자 하는 욕망), 명예, 권세에 대한 욕망이다.


 

태국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의 진의 성제이다. 마땅히 들어라.

이러한 갈애를 남김없이 멸하고, 버리고, 떠나고, 벗어나, 아무 집착도 없게 되기에 이르는 것이 그것 이니라.

이 모든 것이 괴로움인 줄 알고 애욕의 집착을 끊으면 눈을 얻었다고 하리니, 이 생을 마치고는 뒤에 다시 괴로움이 없게 된다. 이는 괴로움과 집착을 없애는 길이니 도라 한다.

 

집착 때문이라 함은 애욕을 따라 생긴다는 것이니, 괴로움과 집착을 모두 없애고 그 길을 따라 진리를 행하여 눈을 얻으면 이 생을 마친 뒤에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이미 진리를 보아도 도의 눈을 얻은 이에게는 다시 태어나고 죽음은 없다.


 

태국

 

비구들이여 이것은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의 성제이다.

마땅히 들어라. 

성스러운 여덟 가지의 가 그것이니이다.

정견(正見):올바로 보는 것이다.

정사(正思:正思惟):올바로 생각하는 것이다.

정어(正語):올바로 말하는 것이다.

정업(正業):올바로 행동하는 것이다.

정명(正命):올바로 목숨을 유지하는 것이다.

정근(正勤:正精進):올바로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이다.

정정(正定):올바로 마음을 안정하는 것이다.

정념(正念):올바로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함경 팔정도-


 

 

아함경에 따르면 부처님께서는 사성제라 불리는 (고, 집, 멸, 도) 단언적 명제를 내 세우고 나서 순차적으로 설명해 나가셨을 것이 틀림없다 라고 쓰여있다. 맨 처음 제기된 그것은 "고" 또는 고의 성제이다.

이것은 과제의 제시이다. 인생의 현실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이다. 

부처님께서는 정확히 말씀해 주신다.

생, 노, 병, 사 즉 네 가지 '사고'가 사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하늘 위에 오르고, 바다 밑에 잠기고

산골짜기 깊숙한 동굴에 숨는대도

죽음의 검은손이 미치지 않는

그런 곳은 이 세상에 있음 없어라.

법구경-

 

그것뿐이니다. 미워하는 사람과도 만나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도 헤어질 때가 있다. 또 채워지지 않는 욕심도 허다 허다하다. 우리의 생활이란 괴로움으로 뒤덮여 있지 않은가! 붓다는 이러한 생각에 이르렀을 때, 소스라 치게 놀란 나머지 저 크나큰 포기 출가를 감행했던 것이다. 이러한 현실 위에

"이는 고이다."라는 제1 명제가 세워지기에 이른 것이다.


 

미안마사원

 

두 번째 제시된 명제는 "이는 고의 발생이다."(집)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런 인생의 현실을 통찰 한 다음, 그 발생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 운명인 듯 생각된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고 만다면 우리는 무기력한 운명론자가 되고 말 것이다.

아니다. 아니다. 불교는 누구에게 기대어 내 운명을 맡기거나 허무주의나 염세주의적 운명론이 절대 아니다.

불교는 절대 이런 운명론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까지의 부처님의 발자취를 잠시나마 따라가 보았다.

그는 절대 운명에 기대어 비관하거나 자신을 흐르는 데로 두지 않았다. 

또한 삶을 비관하거나 그 상태에 안주하여 머물지도 않았다.

그러면 그것을 극복할 방법은 있는 것일까?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것이야 말로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길을 찾기 위한 과정을 목숨까지 걸고 추구했던 문제였다.

(고의 멸진의 방법)

그리고 그 크나큰 깨달음이 이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 물음은 연기의 법칙 즉 일체의 존재는 어떠한 조건(인연)에 의해 어우러 져 있고, 따라서 자이니 실체니 존재하지 않는다는 원리에 의해 훌륭히 해결이 났던 것이다.

 

깨달음의 경지에서 인생을 괴롭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라고 볼 때 즉 고의 발생의 원인 그것은 갈애 즉 목마른 이 가 물을 찾는 것에나 비겨야 할 불타는 욕망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셋째로 제시된 것은 고의 멸진이다.

인생이 욕망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괴롭기 되었다면 우리는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오직 한 가지 방법 불타는 욕망을 가라 앉히는 길 뿐이라는 것이 세 번째 명제이다.

 

모름지기 이 길을 걸어간다면

괴로움이 마침내 스러지리라.

욕망의 화살을 뽑아버리고

깨달아 나는 이를 설함 이로다.

법구경-

 

인생의 고통으로 가득 차게 하는 것이 갈애에 있다면 그것을 뿌리 뽑는 수 밖에는 도리가 없다.

그것은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일이 아니냐고 말할지는 모른다. 그것에는 기적도 없고 신비도 없다.

그것을 서운하게 여길 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붓다란 그런 분이며 불교란 그런 종교이다.

그것을 후세의 불교인들은 "불교에는 불가사의가 없다"라고 한다. 하지만 붓다 이전에 이 당연한 이치에 눈뜬 사람이 있었던가? 이것은 평범하다면 평범하지만 위대한 평범이 아닐 수 없다.

본래 진리란 당연하지 않을 것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인 는 것이 우리 범부라면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진리요 깨달음인 것이다.


 

태국에서 가장큰부처님

 

네 번째로 이르는 길은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이다.

이것은 실천론이다.

재 3의 명제에 입각해 수립된 원칙에 의해 고를 없애기 위한 실천방법을 보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팔정도이다.


 

캄보디아 사원

 

이 시 타파의 녹야원 나무 그늘에 앉아 부처님께서 오비 구에게 말씀하신 내용이 이 내용들이었다.

이렇게 짧은 포스팅으로 이 많은 내용들을 적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비구 또한 대번에 이해되지 않았던 것 같다.

낡은 문헌 중부 경전 26 성구경에 의하면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흥미로운 내용이 있어 적어보려 한다.

"이리하여 두 명의 비구에게 설명할 동안은 다른 셋이 나가서 탁발하여, 세 사람의 비구가 탁발해 온 것을 가지고, 여섯 명이 살아갔다. 또 세명의 비구에게 가르치고 있을 때는 두 사람의 비구가 탁발하여, 그들이 얻어온 것으로 여섯 이서 생활했다.

이런 며칠이 지나자 드디어 다섯 비구 중 한 사람인 콘단냐가 그 사상의 체계를 이해하게 되었다.

경전은 그것은" 콘단냐는 먼저 티 없는 청정한 법의눈을 떴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본인에게도 기뻤으리와, 아마도 그 이상으로 좋아한 분은 부처님 바로 그분이셨다.

그때의 상황을 경전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콘단냐는 깨달았다, 콘단냐는 깨달았다!"

부처님의 환의의 말씀이 이곳까지 들리는 듯하다.

이제껏 혼자서 가슴속에 지니고 있던 깨달음의 내용을 가까스로 남에게 이해시킬 수 있었던 부처님의 무량한 감개가 함축되어 있는 듯한 외침이었다.

그 이후 콘단냐는 깨달은 콘단냐라는 뜻의 안 탄냐 콘단냐라고 불리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그래서 내 영어 이름이 안 탄냐에서 온 안나이다. (저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따라가 깨닫고 싶습니다.)

이윽고 나머지 네 명의 비구들도 부처님의 설법을 이해하게 되었고 이 세상에는 여섯 분의 성자가 계셨다.

라고 경전은 말하고 있다. 그때 십천 세계가 진동했으며 무한한 광명이 이 세상에 나타났다.

즉 불교의 성립을 뜻함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부처님의 말씀을 조금씩 초천 법륜경으로 살펴보며 왔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진도를 빨리 나 간이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앞으로 부처님 일생을 쭈욱 적어 나갈 것입니다.

또 하나는 다른 갈림길로 마하시 사야도 초천 법륜경을 차례로 정리하는 포스팅을 따로 하려고 합니다.

오비구가 되어 조금 더 알고 싶으신 분은 앞으로 초전법륜경까지 읽어주신다면 조금 더 유익하실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분들께서는 이글부터는 부처님 일생과 초전법륜 경과는 따로 생각하여 알아차려 주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아래의 글을 읽고 가셔도 괜찮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구독자님을 생각해 봅니다.

편안하시길 바랍니다.

넉넉하시길 바랍니다.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가슴 따뜻한 사람들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몽 하나 올림.

 

 

 

 

2021.03.15 - [부처님 일생] - 20.부다가야에서 바라나시의 교외 이시타파에 도착하시다.

 

20.부다가야에서 바라나시의 교외 이시타파에 도착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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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wanseeum99.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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