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몽 하나입니다.
오늘도 무탈하시지요?
지난 부처님 이야기 17. 첫 법문을 어떻게 펼까 깊이 생각하시다.
를 보시지 못한 분은 잠시 읽고 오셔도 괜찮습니다.
2021.03.11 - [부처님 일생] - 17. 첫 법문을 어떻게 펼까 깊이 생각하시다.
오늘의 부처님 이야기 시작합니다.
열여덟 번째 부처님 이야기 우리는 오늘은 부처님을 따라 녹야원으로 가기 전 아함경의 이야기를 따라
보리수 아래 그를 잠시 바라보고 가려한다.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그는 오랜 시간 그 고장에 머무르면서 명상을 계속하였다.
우리는 이 부분에 매우 주목해야 한다.
아함경에서는 이때 붓다께서 생각한 것은 두 가지라고 하신다고 경은 말하고 있다.
첫째 설법을 위해 조직화하고 체계화하는 일이었을 것
이 이야기는 경전 어디에도 나와있지 않다 하지만 아함경에서 말하는 이와 같은 주장은 붓다께서 최초의 설법을 하실 때
깨달음의 사실적 주제가 되었던 연기의 법칙과 최초의 설법에서 주제가 되었던 네 가지 진리가 주제가 사실 같지만
얼른 봐서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붓다께서 깨달음의 내용을 결코 그대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연기의 법칙은 매우 어려운 주제였기 때문에
세심한 배려에 의해 조직화되고 체계화되어 이른바 네 가지 진리로
제시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그런 조직은 언제 이루어졌던 것인가 그것은 보리수 밑에서의 명상 중에 아마도 설법의 결의가 서고
난 다음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두 번째 첫 설법의 대상의 선택의 생각이었을 것.
누구를 향해 이 진리의 법을 설 할 것인가를 하는 것이었으리라.
앞에서도 이미 수차례 언급한 바 세상 상식을 뒤엎는 그것,
심심 묘한법 격정이나 무지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좀처럼 이해되지 않은 것.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라고 생각하신 점이다.
그리하여 두 분 우따까와 알라마를 생각하셨지만 이들은 죽고 없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고 아함경은 말하고 있다.
그들이라면 이러한 사상을 검증해주고 이해해주었으리라.
하지만 이렇게 말한다면 후세의 불교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터무니없는 억측이라고 할지는 모른다.
이미 붓다의 확고한 신념은 보리수 밑에서 정각에서 확립된 것이라고 질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함부 경전이 말하는 붓다의 인상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아함경은 말하고 있다.
붓다는 결코 경솔하게 확신해 버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신령에 충만하여 포요하는 사람과도 성격이 달랐다.
검토에 검토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확신을 가지고 자기의 길을 걸어 가는 것,
그것이 붓다의 사람됨임을 생각해야 한다.
더욱이 당시 붓다는 서른다섯밖에 안된 젊은이였음을 생각해야 한다.
비록 크나큰 해결은 이루어졌을망정 그것을 내세우면서 천하에 군림할
자신은 충분하게 서 있지 않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흔들림 없는 확신과 절대적인 자신은 얼마 안 가서 확립되기 이르니 처음 뜻에서 보면
첫 설법이야 말로 붓다에게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 그것에 어떠한 자세로 임했는가가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아함경-
우리는 내일 오비 구가 있는 바라나시의 교외 이시파타야로 250 km 가 넘는 긴 여정을 부처님과
떠날 것이다.
붓다께서 오직 설법을 위해 그 먼길을 맨발로 떠나셨다는 점에 주목하면
그가 얼마나 첫 설법에 열성적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
나는 과연 살면서 그런 적이 있었던가?...
어떤 환희 심이셨을까? 그런 환희심이 있었었나?
내가 좋아했던 것이 무엇이었던가?
(나를 발견하는 시간이 된다. 몽하는 찾았습니다. 빙고 ^^)
마음속으로 머릿속으로 어떤 것들을 정리하셨을까?
그에게서 배울 수 있는 삶의 태도 단 한 가지라도... 얻어가시길 간절히 바라본다. 나는 신중함...
이 아침 2500년 전 길을 떠나는 설법을 위해 맨발로 250킬로를 걷는 그를 생각해보며
오늘도 나의 길을 찾아봅니다.
그분의 삶이
길을 찾는 당신에게
소중한 빛이 되길 바라며
오늘도 새벽부터 이 글을 써봅니다.
오늘도 소중한 당신을 응원합니다.
몽 하나 올림.